제목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에서 조자용을 만나다
작성자 이영실
작성일자 2014-08-22
조회수 2946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에서 조자용을 만나다

 

호눌룰루 아카데미 미술관 정문 앞

조자용 연구자, 그의 흔적을 찾아나서다
우리 민화 연구의 선각자 대갈 조자용 선생에게 미국 하와이에 있는 호놀룰루 미술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그가 미국에서 우리 민화를 주제로 첫 민화 전시회를 연 장소, 다시 말하면 민화의 세계화를 위한 행보를 시작한 첫 공간인 셈이다. 그곳엔 아직도 그의 체취가 남아있었다.
 
한국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민화 ‘운룡도’
필자는 우리 민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대갈 조자용 선생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문헌자료는 물론, 국내·외에 걸친 그의 흔적을 찾아 방문하며 그의 체취를 느끼려 애쓰고 있다. 조자용 선생에게 미국 하와이에 있는 호놀룰루 미술관은 자못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그가 미국에서 우리 민화를 주제로 첫 민화 전시회를 연 장소, 다시 말하면 민화의 세계화를 위한 행보를 시작한 첫 공간인 셈이다. 지난 6월 14일, 필자는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내려 하얏트호텔 건너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Honolulu Academy of Arts)에 들어서니 한국관 전시실 전면에 운룡도가 걸려 있었다. 나를 처음 반긴 그림이 운룡도라니! 생각지도 못한 그림이었다.
구름에 파묻힌 듯한 용의 더듬이가 여의주를 휘감아 채고 있는 힘찬 그림. 이 그림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0년 발간한 『미국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 소장 한국문화재』에 실린 2007년의 전시관 사진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있다. 이 운룡도가 한국관의 ‘얼굴’ 역할을 해 온 것이 꽤 오래 전부터였다는 반증이다.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은 미국 내에서 최초로 한국관 상설전시장을 운영한 곳이다. 이 운룡도는 1979년 <동경신문>에서 주최하고 동경을 비롯한 일본 6개 도시를 순회하였던 ‘이조민화’ 전시도록에도 나오는 그림이다. 이 ‘이조민화’ 전시에는 조자용 선생이 설립한 에밀레박물관의 소장품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당시에는 이 그림이 일본인 개인소장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 민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던 이조민화전은 지금도 민화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강담사의 <李朝の民畵>라는 도록이 나오게 된 계기를 만든 전시이기도 하다. 이 도록에도 호눌룰루 미술관의 운룡도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운룡도는 알란 카터 코벨(Aian Carter Covell, 존 카터 코벨의 아들)이 라는 책에서 속리산 에밀레 박물관의 ‘Red Dragon’으로 소개 하고 있다.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 동양미술 전시관의 회화 부문만 살펴보면, 동아시아 3국의 그림이 각기 특색있게 분류, 전시돼 있다. 중국은 수묵화(水墨畵), 일본은 우끼요에(浮世絵), 한국은 민화(Minwha)이다. 각 나라별로 가장 특색있는 미술 세계를 보여주려고 의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민화 운룡도가 한국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미국 미술관의 선택이다. 그들이 무엇을, 어떤 그림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75년 조자용 선생은 하와이대학교 안에 있는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의 연수에 참가 중 제퍼슨 홀에서 미국 최초의 민화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최영호 교수의 말에 따르면 하버드대 출신의 건축가이자 에밀레 박물관 관장이었던 조자용의 민화 전시에 호놀룰루 미술관과 하와이대 미술관 등 하와이 문화계는 유례없는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조자용은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을 보면서 한국에서의 더 나은 미술관 조성을 꿈꾸었을 것이고, 호놀룰루 미술관은 조자용의 민화전시를 보면서 한국 미술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어쨌든 이 전시회를 계기로 그는 한국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켜왔던 민화의 확산과 세계화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1978년 <경향신문>에 조자용은 “박물관 장사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호놀룰루 미술관에서 느꼈던 감회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와이에서 민화 전시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한 친구가 저녁 초청을 하였는데 박물관 식당이라고 불리는 고급 요리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박물관 식당이 도대체 어떤 곳이냐고 물었더니 그 곳은 호놀룰루 미술관에서 경영하는 일류식당이라는 것이다.”
당시 조자용은 박물관에서 식당을 경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국 미술관은 돈이 많을 줄 알았는데 식당을 경영하여 유지비로 쓴다는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박물관 경영 방법에 대하여 그의 표현대로 ‘심상치 않은 일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우리도 박물관 경영에 경제 원리(經濟 原理)를 도입할 때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당시 다른 친구가 박물관에서 청자를 산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기증 받은 많은 물품들 중에서 너무 중복되고 불필요한 것은 팔아서 박물관에서 꼭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다는 박물관 경제학에 수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Red Dragon(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에서의 명칭, Dragon and Clouds)이 하와이에서 한국 민화의 멋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를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 보면 어떨까?
조자용이 박물관 식당이라고 부른 파빌리온 카페는 미술관 중앙의 아름다운 정원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하와이에서는 유명한 식당이다. 수제 햄버거와 파스타, 샐러드, 닭요리 등이 깔끔하였다. 조 박사는 저녁약속을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2시까지만 주문을 받아 점심만 가능하다.
야외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필자가 좋아하는 이승철의 노래 ‘네버 엔딩 스토리’를 떠올렸다. 조 박사와 우리의 민화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 ‘Never ending story’이다. 그가 앉았던 같은 자리에 40년이나 지나서 찾아 온 필자에게 조 박사는 말한다.
“이 선생, 좋은 시절을 살고 있으니 좋겠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당신들을 위해 열심히 배달부 노릇을 했다는 거를 기억하시지요?”
배달부란 말은 심부름꾼이란 의미로 황해도 사나이 조 박사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호놀룰루 박물관의 한국 민화 컬렉션
하와이 최대의 미술관인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은 호놀룰루 태생 선교사의 딸로 미술품 수집가인 앤 라이스 쿡(Anna Rice Cooke, 1853-1934)이 1927년에 아시아 유물 전시를 위해 개관했다. 그 유명한 폴 고갱의 “타이티 해변의 두 여인”도 이곳에 있다. 이 미술관은 아시아와 미국 그리고 유럽의 회화와 장식미술품, 그리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전통 민속품 등 약 6만점이 넘는 유물을 소장한 하와이 최고의 예술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이곳에 소장된 한국 민화로는 해학반도도 병풍, 화조도 병풍, 백자도 병풍, 연화도 병풍, 어해도 병풍, 백수백복도 병풍, 책가도 병풍, 작호도(鵲虎圖), 호자도(虎子圖), 운룡도, 감모여재도, 산신도, 무신도, 무녀도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무녀도를 살펴보면 붉은 색 끝동을 댄 꼭 맞는 흰 저고리에 둥글게 부푼 남색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이 조선 후기 풍속화 중에 미인도의 복식을 연상시키지만 직선에 가까운 철선으로 그려져 있어 민화의 형식이 확연하다.
『미국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 소장 한국문화재』에 수록된 한국 회화 27점 중 허백련의 묵매도 등 3점의 수묵화, 채용신이 그린 오연필 초상화, 에밀레종 비천상의 탁본 1점, 16세기 왕실 발원 불화로 유명한 영산회상도 등 불화 6점을 제외한 16점이 민화이다. 이 정도면 민화야말로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한국회화가 아닌가. 이곳의 소장품은 조자용이 1976년 하와이 민화전시에서 선보였던 종류의 민화이다. 물론 같은 민화는 아니지만 내용으로 보면 비슷한 구성이라는 말이다.
호놀룰루 아카데미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민화는 해학반도도 병풍이다. 19~20세기 궁중에서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 병풍은 전체 높이가 270cm로 압도적인 크기이고, 순금으로 배경을 장식하여 화려한 위용을 보이는 희귀한 병풍이다. 우측 상단에 금분으로 쓰여 진 임인(壬寅, 1842년 또는 1902년) 간지가 발견되어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하다. 화기를 남기지 않는 조선 궁중회화 전통을 미루어 민간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누군가의 장수를 빌면서 그렸을 이 작품은 천도복숭아가 탐스럽고 바다에서 막 해가 떠오르는 영원의 세계에 오색구름이 세상을 뒤덮고 아홉 마리의 학이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메추라기, 민들레, 나리꽃이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1928년 전시사진을 보면 이 작품의 전시를 위해 특별히 공간 마련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영향이 느껴지는 해학반도도 병풍은 2006년 7월부터 2007년 9월까지 14개월 동안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보존처리 지원을 하였다. 2014년 2월에는 이곳 미술관 수장고에서 1586년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계회도(契會圖)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호놀룰루 미술관은 하와이가 가진 지역적 특성답게 동서 문화의 경계로서 동양과 폴리네시아 그리고 서구를 모두 아우르는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로 1천여 점에 달하는 우리의 문화재가 이곳에 있다. 조 박사는 이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동서문화센터에 남은 조자용의 체취
하와이 대학교 역사학부 교수를 지내고 은퇴하신 최영호(崔永浩, 1931~) 교수 부부와 함께 동서문화센터가 있는 호놀룰루 마노아의 하와이대학교를 찾았다. 조 박사가 수없이 걸어 다녔을 온갖 꽃들이 만발한 캠퍼스를 걸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 교수가 말하길, 조 박사는 1975년에서 1976년에 걸쳐 6개월 정도 하와이에 머물렀는데 사실은 1년 정도 머물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타국에서 혼자 민화전시를 준비하느라 너무 무리한 탓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일찍 귀국해야 했다. 1976년 자신이 건축한 정동의 미국대사관저 준공식에는 휠체어를 타고 갔을 정도였다. 그것이 그에게는 건축가로서는 마지막이 일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몸이 회복되자 1976년 12월, 한국박물관협회의 전신인 한국민중박물관협회를 창립했다. 1968년부터 8년 동안 사립 박물관인 에밀레 박물관을 운영하였으니 박물관의 중요성이나 어려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이 희미했던 시절, 박물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곳 동서문화센터의 박물관 경영과정(Museam Management) 교육에 참가하면서 박물관이야 말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확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서문화센터에서는 연수생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면서 문화, 경제, 인구 등 여러 분야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는 각국에서 온 박물관 관계자 10명과 함께 생활하면서 여러 나라의 박물관 운영에 관한 정보를 접했을 것이다. 연수 프로그램의 하나로 진행된 에밀레 박물관의 민화 전시는 제퍼슨 홀에서 산신각을 차리고 시루떡을 놓고 고사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 조 박사는 코벨 교수의 도움으로 하와이대 미술대학 학생들에게 10시간에 걸쳐 민화에 관한 강의를 하는 등 민화 알리기에 열정적으로 나섰다.
조자용이 연수를 받던 1975년 당시 동서문화센터에서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펠츠 윌리암(Feltz William) 아트 프로그램 매니저의 회고이다.
“내 기억으로 민화 전시회는 약 일주일간 제퍼슨 홀 회의실에서 열렸고 조자용은 전시된 작품의 소유주로서 이 전시회의 책임자였다. 뉴질랜드인 제임스 맥(James Mack)이 주관한 6개월 과정은 중간 경력의 문화계 종사자들에게 기본적인 박물관 운영을 교육시키는 과정이었다. 약 10명 정도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온 참석자들 중 조자용은 다소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며, 서울에서 에밀레 박물관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물관 운영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
최 교수 말에 따르면 당시 하와이대 미대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고 있던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2~1996) 교수가 조 박사의 영향을 받아 1976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후 1978년부터 9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미술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 미술사가 전공이었던 코벨은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그때까지 일본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한국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많은 기회를 준 일본에 대해 학자적 양심으로 비판하면서 일본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한국미술을 밝혀내기도 했다. 한국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 정도로 여겨지던 1970년대 말에 코벨은 세계 속에 한국 문화를 알린 둘도 없는 귀중한 미술사학자다. 그만큼 조자용 박사가 코벨 교수에게 준 영향은 정말 값진 것이다.
필자는 호놀룰루에서 만난 조자용 박사의 이야기를 그가 한국민중박물관협회 회장을 수락하면서 배달부 노릇을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말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제가 여기에 회장을 맡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얘기이고 사실 제게 어울리는 것은 배달부 노릇입니다. 배달부 노릇을 하라면 서슴치 않고 밤낮을 뛰어서 하겠는데 회장을 해라. 참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뜻이므로 그저 제 생각은 회장이 된 것이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저 배달부로서 여기 뛰고 저기 뛰어서 배달부 노릇을 충실히 하겠다는 한마디 맹세를 하겠습니다.”
 
글·사진 : 이영실(한국민화센터 이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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