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중국의 제례그림, 가당도
글쓴이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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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제례그림 : 가당도(家堂圖)


 

우리네 설날과 마찬가지로 지금 중국은 최대 명절인 춘절이다. 중국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설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남아있으며 이때 종족사당이나 가묘를 그린 그림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국에서는 사당을 가당이라 하기 때문에 그 그림들을 가당도라 칭하겠다. 가당도는 주로 산동성 · 산서성 · 하남성 · 하북성에 소재하는 연화작방(年畵作坊)에서 제작되었는데 각 작방별로 부르는 명칭이 제각각이다. 예를 들면 하북 무강(武强)에서는 가당, 산동의 고밀(高密)에서는 족영(族影) · 가당, 활현(滑縣)에서는 족보 · 명의(名義) · 가보축(家譜軸) 등과 같이 다양하게 불리워지고 있으며 아직 명칭이 어느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단지 최근 중국에서 발간되는 책들에서는 가당도라는 명칭으로 쓰는 경향이 있고 본인 또한 글의 편의를 위해 가당도라 명칭하는 것이다.

가당도는 직접 그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조판인쇄로 된 것이 보편적인데 언제부터 제작되고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지 못했다. 단지 현존하는 그림 중 명판양(明版樣)이라 적힌 것이 있어 다른 연화들과 마찬가지로 명나라때부터 이미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명말(明末)로 가정해 보더라도 조선의 감모여재도보다 적어도 150~200년 전에 이미 제작되고 사용된 것으로, 명절이면 선조의 초상(祖宗畵)을 걸고 제사를 지내던 중국의 오래된 풍습에서 유래했다. 중국의 풍속에 따르면 사당에 조종화를 걸고 제사를 지내야했지만 조상의 초상을 그릴 경제적 여유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당 안에 선조부부가 앉아있는 형상의 도상을 조판인쇄로 제작하여 조종화의 대용으로 사용한데서 출발했다. 이렇듯 가당도는 그 시작이 조종화의 한 형식으로서 비롯된 까닭에 조선의 감모여재도와 달리 화면 내 인물 도상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가당도의 도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위의 개수가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감모여재도는 위패의 개수가 한 개 내지 두 개로만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고위(考位)만을 모시는가 고위와 비위(妣位), 즉 부부를 함께 모시는가에 따른 구분일 뿐으로 기제사(忌祭祀)를 위한 용도이다. 반면 중국의 가당도에는 위패가 한 개인 것, 위패의 개수는 한 개이지만 삼대종친(三代宗親)’이라 합동식으로 표기된 것, 그리고 시조 이래 모든 직계 · 방계의 조상 신위를 함께 모실 수 있도록 수십 수백 개에 이르는 위패자리를 두고 여기에 선조의 명의를 순차적으로 기입하여 사용하도록 마치 족보형태로 구성된 것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신위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가당도의 크기와 도상적인 구분 또한 비교적 명확하다. 따라서 신위대수의 표현방식에 따라서 가당도의 유형을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신위대수의 차이는 지내고자 하는 제사의 내용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달리 제사의 종류, 즉 용도에 따른 구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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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패형>
                               <삼대종친형>                              <대도형>


 

신위의 표현에 따라 가당도의 유형을 신패형(神牌形) · 삼대종친형(三代宗親形) · 대도형(代圖形, 또는 족보형), 이 세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먼저 신패형이란 우리네 지방(紙榜)과 같은 것인데 중국에서는 신패라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그림 중앙에는 연좌대 위에 올려진 사각의 위패, 또는 불교식 위패가 그려져 있고 그 위패 안쪽으로 긴 사각의 공간을 여백으로 두고 여기에 해당 신명(神名)을 적어 제사를 지내도록 된 형식이다. 보통은 우리 지방과 거의 엇비슷한 사이즈로 작은 것이 대부분이며 조상신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에게 제사 지낼 때에도 사용한다.
다음 삼대종친형이란 사당의 내부에 삼대종친이라 쓰인 위패를 두고 그 좌우 또는 상부에 선조부부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형식의 그림이다. 위패에는 이미 삼대종친이라고 인쇄되어 있어서 따로 신위를 기입할 필요없이 그 자체로 사용하도록 되어있는 형식이다. 크기는 47×49정도로 작은 경우가 많고 족자식의 표장(表裝)보다는 그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에서도 간단한 제사를 위한 형식임을 알 수 있는데 주로 춘절 기간에 일회성으로 사용하고 불살라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삼대종친형은 원래 조종화의 대체품으로서의 시작된 기능에 맞게 선조부부의 초상이 비중 높게 그려지고 있다. 대부분 당상에는 선조부부가 마주앉아 있고 중간의 위패는 삼대종친을 나타내며 당전에는 관직에 오르거나 명예로운 자손이 나열되어 있기도 하고 새해를 경축하는 분위기의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 뜻은 가택이 흥성해지라는 의미이다.
대도형(족보형)이란 3대 혹은 5대 이상의 조상의 신위를 위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적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 형식이다. 중국에서는 족보(族譜)를 달리 가보(家譜)’라고 표현하는데 이 가보와 비슷하게 먼 윗대부터 직계와 방계를 포함하는 규모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명·청대 당시의 종족사당에서 지내는 사제(祠祭)나 묘제(墓祭) 등과 같은 종족 규모의 제사를 본뜬 도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던 것이 서민들 사이에서는 간이족보와 같은 역할도 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도형은 도상 구성의 기원에 따라 다시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선조부부의 초상과 그 아래로 조상의 명의를 기입할 수 있는 격자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형식, 초상 대신 역대시조(歷代始祖)’또는 삼대종친이라 적힌 위패와 조상의 명의를 기입할 수 있는 격자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형식, 그리고 마치 하나의 조상 묘역을 묘사한 것처럼 장지(葬地)구조에 따라 위패를 배열한 형식이다. 장지구조형의 경우 활현지방의 작방에서만 제작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의 작방에서 제작되는 대도형들이 주로 홍색·황색으로 그려지고 신년의 경쾌하고 활달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남색계열의 차분한 색채가 주조를 이루며 화면 내 인물의 표현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선조 부부의 초상이 있는 형식

초상 대신 위패로 대체된 형식

장지구조형


 



 

 



 



이상으로 중국에도 조선의 감모여재도와 같은 용도의 그림이 있어서 도상적으로 간단하게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 유형을 정리해 보았다. 감모여재도나 가당도는 모두 제례를 위한 용도의 그림이었기에 도상의 중심은 조상의 신위를 모시기 위한 위패나 그 상징물에 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 덧붙여 민중의 다양한 정서적· 신앙적 형태와 바램을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의 문화적인 배경이 달랐던 까닭에 도상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표현된 신위의 개수에 차이가 있다는 점과 인물도상의 등장 여부이다. 이는 각기 당시 두 나라에서 실행되던 제사의 종류가 달랐고 그림 제작의 동기가 달랐음에 기인한다. 조선과 달리 중국에서는 이미 宋代부터 민간에서도 시조(始祖)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시조 이래의 모든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내왔던 오랜 전통 속에서 조상을 개별적 대상이 아닌 집합체로서 대하는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삼대종친이라고 하는 위패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가당도가 제작되던 명·청대는 종족활동의 극성기로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종족 내에서 사대부의 지도 아래 모든 제사 형식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당제사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 대도형식의 가당도인 것이다. 조종화를 대신해서 제작된 기원을 반영하듯 선조 부부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도상들이 등장하고 주로 신년을 축하하는 도상으로 이루어져있어 유교적인 철학뿐만 아니라 도교적인 민간신앙적 요소가 함께 어우러진 복합적 형태를 하고 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신년이면 가당도가 제작되고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감모여재도나 교의도의 전통이 단절된지 오래이다. 1970년대 민화를 수집하던 조자룡박사가 고와옥(古瓦屋)의 그림(사당도)을  보고 그것의 정체를 궁금해 하던 중 충청도에 사는 한 노인으로부터 제사용임을 알아냈다고 하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 전에 사용을 멈춘 것으로 1970년대의 우리에겐 이미 낯선 그림이었다. 과거 중국에서 가당도의 존립을 위협한 것이 문화혁명이었다면 조선에서 감모여재도나 교의도를 사용하지 않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례의 여러 부득이한 상황에서 대용품으로서 간편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감모여재도나 교의도의 전통이 어떤 이유로 중단된 것일까? 제작 당시 감모여재도나 교의도는 어느만큼 확산된 문화였던 것일까? 가당도를 보고 있노라면  감모여재도에 대한 궁금점이 더욱더 여러 갈래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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