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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목석으로 찍은 옛그림 전
전시회일정 2012년 07월 17일
이거 붓으로 그린 민화인가?…아니, 판화로 찍어 색 입힌 것!

‘목석으로 찍은 옛 그림’展 새달 5일까지

 
 
서울신문 2012-7-14
 


 

“그게 척 보면 판화인 줄 잘 모를 수밖에 없어요. 붓으로 그린 민화로 생각하는 거죠. 그럴 만도 한 게 판화라는 게 대부분은 일단 한번 찍어 낸 다음에 그 위에다 붓으로 색을 덧입히는 방식을 씁니다. 그래서 저처럼 판화를 한 사람이 아니면 그 선들에서 나무를 깎은 칼맛을 못 느낄 수 있어요. 민화인 줄 아는 작품 가운데 판화를 많이 골라냈습니다.”



이승일(66) 전 홍익대 판화과 교수의 말이다. 이 전 교수는 한국 판화의 1세대로 꼽히는 아버지 고 이항성(1919~1997) 화백과 함께 대를 이어 각종 판화 작품들을 수집해 왔다. 이제까지 모은 작품이 무려 4000점을 넘어선다. 그 가운데 200여점을 뽑아 다음 달 5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목석으로 찍은 우리의 옛 그림’ 전을 연다.
이 전 교수의 목표는 자신의 전시를 통해 ‘조선 판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인쇄술에서 앞섰다고 늘 자랑하지만, 걸림돌은 있다. 그래 봤자 기껏 만들어 고이 모셔 두기만 했을 뿐 그다지 널리 쓰이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판화가 광범위하게 쓰였다는 점이 어느 정도 증명되면 이 같은 약점이 덮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을 법하다. “활자 문화의 모체가 바로 목판화인데 그 의미를 제대로 한번 전달해 주고 싶어요. 그리고 판화 전공자들이 요즘 많이 위축됐는데 후학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은 뜻도 있고요.”

판화는 대량생산, 대량보급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민화나 부적, 장식용 그림 종류가 많다. 하기야 지금에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두고 근대를 낳았다고 격찬하지만 원래 그 인쇄술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면죄부였던 점을 감안해 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해서 이번 전시에 나온 것들도 그런 유의 작품들이 많다. 그러니까 탑이나 불상을 만들 때 그 안에 넣거나 하는 방식으로 복을 받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탑다라니’, 삼재를 막기 위한 각종 부적, 화조도처럼 요즘으로 치자면 실내 인테리어 소품 같은 것들이다.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그런 용도의 그림 같은 경우 치부의 수단으로 변질도 되고 면죄부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다고 했다. 많이 전해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 영화포스터들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의외로 지금껏 남아 있는 포스터들이 얼마 되지 않잖아요. 판화도 분명히 많이 찍어 냈을 텐데 애써 관리하지 않은 거지요. 누가 그려줬다면 소중하게 간직했겠지만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작품들이 격조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성도 높은 그림들이 다수 발견된다고 했다. 이 전 교수는 일본의 다색목판화 우키요에와 비교했다. “우키요에는 화려한 색채로 인해 인상파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그 내용은 오늘날로 치면 만화와 비슷한 거예요. 그에 반해 우리 판화에는 부적이나 지도처럼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된 것도 있지만, 보고 즐기는 감상용으로 제작된 것도 상당합니다. 탄은 이정이나 고산 윤선도의 작품을 판화로 찍어 낸 것도 있어요. 그래서 연구만 잘 뒷받침된다면 조선 판화도 일본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점을 인식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서지학, 국문학, 역사학 쪽에서 연구자들이 달라붙어 한번 총정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소원까지 덧붙였다. (02)720-102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옛 판화 수집벽, 예술적 재능… 모두 아버지의 유산

조선일보 2012.07.29 곽아람 기자



이항성 화백 아들 이승일 교수, 소장품 200여점으로 전시회

 
 
19세기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석판화 기술을 이용한‘해태 부적 판화’. /가나아트센터 제공
판화가인 아버지 옆에서 중학교 때부터 조수 노릇을 하던 소년은 대를 이어 판화가가 됐다. 직업뿐 아니라 '조선시대 판화 모으기'라는 아버지의 취미도 물려받았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木石으로 찍은 우리의 옛그림'(내달 5일까지)에 나온 조선시대 판화 200여점은 모두 이승일(66) 전(前) 홍익대 판화과 교수의 소장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판화 및 판(版) 1000여점과, 자신이 직접 수집한 1500여점 중 수작(秀作)을 엄선한 것이다. 이 교수의 부친은 광복 후 미술 교과서를 집필해 국내 미술 교육 분야를 개척하고 1958년엔 박수근·최영림 등과 함께 한국판화협회를 결성, 판화 보급에 힘썼던 고(故) 이항성(1919~1997) 화백이다.

"아버지는 판화협회를 창설하면서 우리 옛 판화에 눈을 돌리셨죠. 당시만 해도 너무 흔했기 때문에 불쏘시개, 화장실 휴지로 험하게 쓰이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조선시대 판화의 가치를 재발견하셨던 거죠."

1970년대 초 이항성 화백이 도불(渡佛)하자 이 교수는 아버지 대신 '옛 판화 모으기'에 심취했다. 아버지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딱히 의무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좋았다. 장남인 그는 다섯 아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예술적 '피'를 물려받았다. 서울 인사동을 돌아다니고, 거간꾼들과 안면을 터서 모은 작품 중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건 이번 전시에도 나온 18세기 '국장도감의궤반차도(國葬都監儀軌班次圖)'. 가로 880㎝, 세로 49㎝ 종이에 왕실 장례 행렬을 기록한 작품이다. "30년 전 어느 골동품상이 가지고 왔는데 가격이 1000만원 정도 해서 당시로서는 부담이 컸죠. 귀한 작품이라 꼭 갖고 싶어서 겨우 돈을 구해 구입했습니다." 갖고 싶은 작품을 아깝게 놓친 경우도 있다. 근대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1933)의 죽도(竹圖) 목판이 한 예. "20년 전쯤에 문짝만 한 목판 10개를 한꺼번에 발견했는데, 너무 비싸 차마 살 엄두가 안 났어요."
이승일 교수가 전시장에서 보자기, 책 표지 등에 문양을 박는 데 쓰인 조선시대 능화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옛 판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그의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대표작 '공(空)' 시리즈는 양각(陽刻)의 나뭇결이 깊이 있고 명상적인 공간을 연출해 내는 것이 특징. "옛 목판화를 보면서 세월이 지날수록 나뭇결이 더 또렷한 요철(凹凸)을 만들어내는 데 감명을 받았어요. 덕분에 나뭇결을 '시간'의 상징을 받아들이고 작업하게 됐죠." 2005년엔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조선시대 목판화 연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에게 판화는 예술로서 '그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보자기, 책 표지 등에 문양을 박는 데 쓰인 '능화판화(菱花版畵)', 시나 편지 따위를 쓰는 종이인 시전지(詩箋紙)에 장식용 무늬를 찍어 넣기 위해 만든 '시전지판' 등 다양하다. "판화 작업이 우리 조상들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건, 우리 인쇄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거죠. 그렇게 소중한 사료(史料)인 판화가 문화유산이라기보다는 '흔적' 정도로 가벼이 여겨지는 풍토가 아쉽습니다."
작성자 한국민화센터
작성일자 201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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