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화원 김홍도, 사대부의 삶을 그려내고 실현하다
글쓴이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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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의 장벽 뛰어넘은 고매한 의식세계


 

화원 김홍도
사대부의 삶을 그려내고 실현하다


 

조선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는 중인의 신분임에도 안기역을 관할하는 안기찰방을 도맡으며 사대부 의식을 확고히 가졌으며, ‘단원이란 호를 최초를 사용한 <단원도>를 통해 이를 명확히 묘사했다. 이후 김홍도는 평생 스스로 사대부임을 잊지 않았고, 항상 그림의 화두로 삼았다.

이상국(()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참고서적 오주석, 《단원 김홍도》, 열화당, 1998,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
강세황 저, 박동욱 서신혜 역주, 《표암 강세황의 산문전집》 소명출판, 2008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정조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을만큼 화원으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는 하급 벼슬아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서 김홍도의 명성은 너무나 높아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그림을 가지고 싶어 했고 후대의 화원들에게 김홍도의 화풍을 따라하게 만들만큼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선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화원이라는 중인의 신분이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교양을 갖추고 있었고 그와 교류했던 사람들도 당대를 주름잡던 예술인과 학자, 고관들이었다. 단원 김홍도는 화원이라는 중인의 신분이었지만, 주변 인물들은 당대의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인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화원의 신분으로 지방직에 근무하게되는 경우는 순환보 직으로 화사군관 등 지방관청의 화공으로 발령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겸재 정선이 현감(조선 시대에 둔, 작은 현 수령)으로 김홍도, 이명기, 김응환 같은 이는 찰방(察訪,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6품 외직 外職 문관의 벼슬)을 제수(除授, 옛 관직을 없애고 새 관직을 내리던 일)되는 특별한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는 임금이나 세도가와 직접적인 연연을 맺을 수 있는 특출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야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원들이 신분은 중인이지만 왕실에서 근무하면서 교류하는 사람은 대부분 왕족이나 사대부들이었다. 조선시대 왕족이나 사대부는 시·서·화 3절을 기본적인 소양으로 알고 이를 갖추고자 하였다. 겸재 정선과 같은 사대부 화가는 당연히 사대부로서 3절을 갖추었고 신분적으로도 지방관에 근무하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김홍도 또한 3절을 모두 갖추고 있었고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지만 화원이라는 중인의 신분이었다. 강세황이 <단원기檀園記>에서
 

세상에서는 김홍도의 뛰어난 재주에 놀라며 지금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경지라고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에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서 비단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재촉하는 사람들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밥먹을 겨를도 없을 지경이다.”
 

라고 할 만큼 최고의 화가였지만 신분의 한계로 지방 관에 바로 제수되지는 않았다.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데 공을 세워 안기찰방이라는 지방관은 아니지만 지역에서 비중있는 관직에 나갔다. 찰방은 지방관이 아닌 외관직 이지만 지방의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근무하였고, 또한 안동이라는 선비의식이 남다른 지역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김홍도는 안기찰방 시절에 더욱 사대부 의식으로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대부 의식을 잘 표출하는 그림이 안기찰방 시절에 그린 <단원도>(1)인데 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부터 그림의 내용까지 찬찬히 살펴보고자 한다.

안기찰방에 제수된 김홍도
단원 김홍도는 1784년 정월에 안기역도安奇驛道 역참驛站 찰방으로 제수받아 약 2년 반 정도를 안동에서 근무했다. 안기 찰방은 안기역을 중심으로 하는 11개 역과 역도를 담당하는 종6품 관리이다. 안기역은 현재의 안동 안기동에 있었는데 찰방은 역장이나 우체국장쯤 되는 벼슬로 대간이나 정랑직에 있는 명망 있는 문신이 맡아 수령의 실정을 보고하는 역할도 하는 비중있는 자리 였다. 그에 대해 스승인 강세황은 <단원기 우일본又一本>조정에서 예인을 등용하는 일이 진실로 오랫동안 끊어졌는데, (단원)이 포의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朝家之錄藝 固爲曠絶, 而在君亦爲布衣之極也]”라고 하였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김홍도가 안기 찰방에 제수된 공적인 기록과 그 연유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승정원일기》와 스승인 표암 강세황의 《표암 고豹菴稿》의 <단원기檀園記>가 있는데 이 기록을 차례로 보자. 먼저 인사발령의 기록은 《승정원일기》 <乾隆四十八年癸卯十二月二十八日>에 나와 있어 건륭 48 (계유癸卯) 1783 12 28일에 발령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도정都政에서 이조吏曹 벼슬을 비준하였는데 (중략) 김홍도를 안기찰방으로 임명하였다. [都政吏批 (중략) 金弘道爲安奇察訪]”

《영남읍지嶺南邑誌 <안기역선생안安奇驛先生案>에 보면 김홍도는 1784년 정월에 안기찰방으로 부임하여 1786 5월에 임기를 마치고 간 것으로 나와 있다. 승정 원일기의 날짜는 음력으로 나와있어 이를 계산하여 양력으로 바꾸면 1784 1월에 발령받은 것이다. 화원인 김홍도가 안기찰방이라는 비중있는 관직에 발령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강세황의 <단원기>에 잘 나와있다.

 

또 지금 임금 때도 어명을 받들어 임금의 화상을 그려, 이를 크게 칭찬하는 뜻으로 특별히 찰방벼슬에 임명되었다. [又於 當宁朝 承命寫 御容 大稱旨 特授督郵之任]” <檀園記>
 

1781년 김홍도가 어진도사에 동참화사로 참여해서 어진의 초본과 용체(龍體, 옷 부분)를 그렸다. 9 16일 정조 임금의 완성된 어진을 주합루宙合樓 모시는 자리에서 정조가 당시 어진도사에 참여한 여러 화원들에게 그 노고를 위로하여 이조나 병조의 산직散職 가운데 상당하는 자리에 임명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따라서 김홍도는 어진도사의 공로로 산직을 받았다가 그 후 더욱 정조의 신임을 받아 실직實職 안기 찰방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던것으로 보인다. 강세황이 이를 잘 알고 상세히 기록한 것은 강세황이 이 당시 어진도사의 감동역監董役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홍도 당시의 안기찰방이라는 외관직外官職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보자.


안기도는 경상도 11역도 중의 하나로 본역 안기는 안동부 북쪽 삼 리에 있었으며, 관할 범위는 영해·흥해·의 흥·신령 방면의 소로를 관할하였다. 찰방 휘하 본역의 인원과 말은 역리(驛吏, 역참에 딸린 아전) 132, 지인 (知印, 도장을 관리하는 토관직) 86, 36, 20, 사령(使令, 심부름꾼) 20, 대마 2, 중마 2, 복마(卜馬, 짐을 싣는 말) 10필이었다. 본역을 포함한 안기 도 전체의 규모는 역리 1019, 노비 307명이었다. 또한 안기역 관아의 규모도 내·외삼문(·外三門)이 있고, 담장 안에 정자까지 있을 정도의 상당한 규모였음이 기록에 나와 있다.’


이렇게 많은 인원과 시설을 거느린 찰방생활은 김홍도에게 상당한 의미와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안기찰방이라는 직책이 가지는 중요도는 같이 어울리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지방의 여느 지방관과 대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성대중의 《청성 집靑城集》의 내용에서 익히 알 수 있다.

 

‘1784년 월 17일 김홍도는 관찰사 이병모(李秉模, 1742-1806)를 비롯해 흥해군수 성대중, 봉화현감 심공저, 영양현감 김명진, 하양현감 임희택 등과 청량산에서 시와 풍류를 즐겼다.’


김홍도는 이들과 어울리면서 퉁소를 부는 신선 같은 자 태를 뽐냈고 서로 시를 주고받으면서 밤새도록 놀았다고 한다.


역승驛丞 김홍도는 국화(國畵, 나라 안의 으뜸가는 화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였고, 퉁소를 부는 김홍도를 신선에 비유하였다.’

 

김홍도가 청량산의 아회에서 지은 시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구름 병풍 안개 휘장이 한 폭 한 폭 드러나니

[雲屛霧障面面開]

아득하고 망망한 열두 폭, 솜씨도 뛰어나네.

[意匠蒼茫十二幅]


 

짧은 몇 줄의 글 속에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를 적절히 표현한 것만 보아도 김홍도는 당대의 거물인 이병모, 고문 高文 대가 성대중 등과 어울려도 빠지지 않을 만큼의 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김홍도가 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안기찰 방이라는 직책도 있었지만 정조가 신임하는 나라 안 최고의 화가로서 예우를 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사대부들과 어울린 아회雅會 김홍도의 사인 의식을 고양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불문가지다. 당시 김홍도는 이들과의 아회 모습을 담은 <청량취소도淸凉吹簫圖>, <오원아집도>, <징각아집도澄閣雅集圖>를 안동 안기찰방 재직 중에 그렸다고 한다.

이외에도 김홍도가 안기찰방으로 근무하던 시절 사대부 집안과 교류했던 기록 두 가지를 소개한다. 2012년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수금水禽·초목草木·충어蟲魚 10 폭 화첩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수금·초목·충어》 10 폭 화첩은갑진년 6월 단원이 임청각 주인을 위해 그리 다라는 글이 있어 김홍도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임청각은 조선중기 문인이자 안동지역 권세가인 이의수가 안동에 세운 별당 이름이다. 제작연대는 송관자의 발문을 토대로 이태호 교수가 안동에서 임청각 주인을 수소문하고, 발문을 쓴 송관자의 봉화닭실마을을 답사한 결과에 따르면 김홍도가 1784년 안기찰방 부임 후 안동지역 고성이씨 임청각 주인 이의수에게 그려 줬음을 알 수 있다. 1786 5, 안기찰방을 마치기 전에는 안동 풍산읍 상리동에 있는 선성이씨 집안의 체화정棣華亭이라는 정자의 사랑 방에담락재湛樂齋’(2)라는 현판을 쓴 것으로 보인다. 채화정은 조선 효종 때 만포 이민적이 학문을 닦기 위해 지은 건물로 정자와 작은 연못 등이 잘 어우러져 당시 안동 지방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다. 단원도 이 곳에 자주 들렀는데, 이민적의 아들 이한오李漢伍 풍류를 즐기는 친한 사이여서 담락재의 현판을 써준 것으로 전해진다. 현판 휘호를 부탁받은 것은 찰방인 김홍도가 안동의 사대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스승인 강세황도 김홍도의 이러한 능력에 대해사능은 음악에도 능통하여 거문고와 피리와 시의 오묘함이 극에 달하였다. [士能旁通音律 琴笛韻詞 極盡其妙]’고 평할 만큼 중인이지만 사대부가 가져야 할 소양은 넘치고 있었다. 그의 자 사능士能 《맹자》에일정한 재산이 없으면 서도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오직 선비에게서만 가능하다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 참다운 선비, 곧 뛰어난 인격자가 되라는 뜻으로 김홍도는 신분을 뛰어넘어 선비가 되고자 한 것이다.

 

<단원도>를 통해 본 김홍도의 사대부 의식
김홍도는 1783 12 28(음력)에 안기찰방에 임명되어 1786 5월까지 2 4개월간 근무하면서 1784 12 <단원도>를 그렸다. 이 그림은 기행시인인 창해 정란 (滄海 鄭瀾, 1725-?) 1784 12월에 김홍도가 찰방으로 있는 안기역을 찾아 왔을 때, 1781 4 1일 김홍도가 자신의 집단원檀園에서 창해 선생, 강희언과 함께 진솔회眞率會 모임을 가졌을 때를 회상하여 그린 작품으로 정란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림의 상단에 있는 제발題跋 보면 잘 이해가 된다.


창해 선생께서 북으로 백두산에 올라 변경까지 다다랐다가 동편 금강산으로부터 누추한 단원(김홍도의 집)으로 나를 찾아주셨으니, 때는 신축년(1781) 청화절(4 1)이었다. 뜰의 나무엔 햇볕이 따스하고 바야흐로 만물이 화창한 봄날에 나는 거문고를 타고, 담졸 강희언은 술잔을 권하고, 선생께서는 모임의 어른이 되시니 이렇게 해서 참되고 질박한 술자리를 가졌도다. 어언 간에 해가 다섯 차례나 바뀌어 강희언은 지금 세상에 없는 옛사람이 되어 가을 측백 떨기에는 이미 열매가 열렸다. 나는 궁색하여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산남山南 머물러 역마를 맡은 관청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해가 장차 한 차례 돌아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홀연히 선생을 만나 게 되니 수염, 눈썹, 머리칼 사이에는 구름 같은 흰 기운이 모였으되, 그 정력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올 봄에는 장차 제주도의 한라산을 향 하리라 하니 참으로 장하신 일이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원 없이 이야기하기를 단원에서 예전에 놀던 것처럼 하였더니, 슬픈 느낌이 그 뒤를 따르는지라, 끝으로 (단원도) 한 폭을 그려 선생에게 드린다. 그림은 그 당시의 광경이고 윗면의 시 두 절구는 당일 선생께서 읊으신 것이다. 갑진년(1784) 12월 입춘立春 2일 후에 단원 주인 사능 김홍도가 그렸다.”

 

제발의 내용을 보면단원주인 사능 김홍도가 그렸다라고 한 것은 김홍도가 아직은사능이라는 호를 쓰고 그의 집 정원을단원이라 한 것을 알 수 있다. 제발에서 느껴지는 것은 김홍도가 정원을 경영하고 진솔회라는 아집을 베푼 것은 이미 사대부로서 의식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다. <단원도>는 김홍도 작품 중에서단원라는 관서를 사용한 최초의 작품이다. <단 원도>는 이 무렵 김홍도의 내심에 분명해지는 사대부적 의식이 표출되는 최초의 작품인 것이다.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사용한 시기와 의미에 대해서는 표암 강세황이 쓴 <단원기>에 잘 나와 있다. <단원기>는 김홍도가 안기찰방을 마치고 화원으로 복귀해 스승인 강세황에게 청해 받은 것이다. 그 내용 중에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찰방 벼슬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마당을 깨끗이 하여, 좋은 화초들을 섞어 심었다. 집 안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먼지도 일지 않았다. 책상과 안석 사이에는 오직 오래된 벼루와 고운 붓, 쓸만한 묵과 흰 비단이 있을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단원檀園이라 호를 짓고 나에게 기문記文 지어 주길 청하였다. 내가 알기로, 단원은 명나라 때 사람 이장형李長의 호이다. 김홍도가 본떠서 자기의 호로 삼은 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이장형이 문학을 하는 선비로서 고상하고 밝았으며, 그림도 기이하고 전아했던 것을 사모한 것일 게다.”

 

호는 대개 스승이나 친구가 지어주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짓기도 한다. 김홍도는단원이라는 호를 자신이 지어 스승인 강세황의 추인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스승 강세황은 김홍도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사대부 의식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단원기>를 통해 김홍도가 사대부인 것을 인정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원도>에 그려진 김홍도의 화원인단원의 위치에 대해 오주석과 진준현 선생의 견해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오주석은 그림 상단 우측에 있는 정란의 시 첫구 절인금성의 동편[錦城東畔] 물가에 지친 노새를 쉬게 하고를 성산동 금성산으로 보았고 진준현 선생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그림 부탁하는 사람이 문 앞에 가득찬 상황을 보아 창덕궁에 가까운 동대문이나 혜화 동 인근의 성에 면한 곳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로 뜰 뒤쪽에 성벽이 보이고, ‘금성동반錦城東畔이란 한양성의 동쪽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필자는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굳이 판단한다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성산동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화원이 아무리 뛰어나도 관직으로는 미관말직에 해당하기 때문에 궁궐 옆에서 번듯한 집을 짓고 아회를 열면서 살기는 어려웠을 뿐만 아니고, 그림처럼 실제 김홍도의 집이 치장되어 있을 지도 의문이다. 그림 상단의 왼쪽 에는 이인문이 이 그림을 보았다[古松流水館道人李文郁觀]’는 관화기觀畵記 있는 것으로 보아 친구인 이인문이 김홍도의 <단원도>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원도>를 잘 분석해 보면 제발 뿐만 아니라 그림의 내용 속에도 이미 사대부의 생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단원도>는 그 형식이 문인들의 아집도일 뿐 아니라 화풍에서도 명대를 대표하던 오파 문징명文徵明 수지법(樹枝法,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줄기, 가지, 잎 등을 표현하는 방법)이 짙게 드러난 문인화풍인데 그림을 살펴보자.

작품의 소재인 수양버들, 하인과 나귀, 파초, 소박한 초가 草家, 연지蓮池, 괴석, 석상石床, 오동나무, 소나무, , 거문고, 비파 등을 보더라도 문인의 한거閑居 상징됐음을 알 수 있다. 화풍에서 수지법의 표현을 보면 명대 오파吳派 문징명이나 동기창董其昌 영향을 생각나게 한다. 대문 옆의 수양버들, 오동나무, 소나무에서 소략한 수지법을 사용했고 산수 표현은 다소 거친 맛이 나면서도 죽은 나목의 하늘을 찌르는 기개 등이 조화롭게 묘사 되었다. 인물을 표현한 필선도 이전의 김홍도 작품에 비해서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사립문 밖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과 나귀는 여행가인 정란을 따라온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마부와 말, 나귀의 서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작품의 소재는 대부분 선비의 고고함와 은일隱逸 상징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무들은 대개 선비들 의 절개를 상징하고 초옥과 거문고, 비파, 학은 사대부 들의 은일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조선과 중국에서 많이 그려졌다. 김홍도의 고사인물도나 아집도 종류를 보면 <단원도>에 등장하는 소재나 화풍이 그대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안기찰방 이전에 그린 아집도로 아회의 모습을 그리는 소재의 모델이 되는 그림으로 1778년 그린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를 꼽을 수 있다. (3) 담장 밖의 버드나무, 태호석으로 보이는 괴석, 소나무, 오동나무, 학 등을 그렸으나 중국의 고사를 그렸기 때문에 중국풍의 묘사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림과 삶에 나타난 사대부로서의 철학
안기찰방을 마치고 귀경한 이후 그린 작품들에서 은일을 상징하는 초옥과 낮은 담장, 담장 밖의 시종과 휘휘 늘어진 수양 버드나무 등 사대부의 외형적 모습뿐만 아니라 철학적 내용이 그림에 표현되는데 대표적 작품이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4). 이 작품은 1800 년 정초에 정조에게 진상한 8폭 병풍인데 각 폭에는 주자의 칠언절구 한 수씩과 성리학자 웅화熊禾 적혀있다. 이 작품을 보고 정조는 김홍도가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고 하면서 화폭에 보이는 주자시마다 화운시和韻詩 붙였다. 정조도 김홍도의 학문적 소양을 인정한 것이다. 1801년에는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를 그렸는데 화제인 삼공불환은 평생 포의布衣 지낸 남송의 시인 대복고戴復古 시에 나오는 말로 그 뜻은전원의 즐거움을 삼공의 높은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로 선비의 은일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사 인물도> 8폭 중 <취후간화醉後看花>를 통해 김홍도는 송나라의 시인이며 은사隱士 임포林逋 평생을 매화를 아내삼고 학을 아들 삼아 유유자적하며 보낸 매처학자梅妻鶴子 삶을 동경했음을 알 수 있다. (5) 1805년에 그린 <추성부도秋聲賦圖>(6)는 병들고 힘든 말년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를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소재나 추성부의 내용을 볼 때는 구양수가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남종화풍의 양식을 띠고 있으나 완벽한 김홍도의 화풍이다. 이처럼 김홍도는 안기찰방 시절 고양된 은거와 은일한 선비의 삶에 자신을 빗대어 작품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실제 사대부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도1 김홍도, <단원도>, 1784년, 지본담채, 135×78.5㎝, 소장처 미상



도2 김홍도, 담락재湛樂齋 현판, 1786년, 35×90㎝, 개인소장.
 


도3 김홍도, <서원아집도>, 1778년, 견본채색, 122.7×287.4㎝,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도4 김홍도, <주부자시의도>, 1800년, 견본담채, 40.5×125㎝, 개인소장.
 


도5 김홍도, <고사인물도>8폭 병풍 중 <취후간화>, 98.2×48.5㎝,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도6 김홍도, <추성부도>, 1805년, 지본담채, 56×214㎝,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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