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정선의 청출어람 <금강전도金剛全圖>
글쓴이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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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의 청출어람

<금강전도金剛全圖> 

정선의 <금강전도>가 진경산수화 중에서 청출어람으로 꼽히는 이유는 작품성은 물론 진경산수화가 지닌 독특한 특징과 미술사 작품으로서의 기록성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 그 특징을 조목조목 짚어보고 아울러 옛 선인들에게 금강산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글 이상국(한국민화센터 이사)

 

국보 217 <금강전도>는 겸재 정선이 영조 10(1734) 청 하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크기는 가로 94.1, 세로 130.7㎝로 현재 삼성미술관 리 움에 소장되어 있다. 겸재의 작품은 2점이 국보로 지정되 어 있는데 <금강전도>( 1)외에 말년인 75(1751)에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국보 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술사학계의 석학인 안휘준 교수는 <금강전도>가 진경 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청출어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금강전도>가 진경산수화 중에서 청출어람 작품인 것은 금강산이라는 그림의 주제, 작품성과 조형성, 조선후기 산 수화의 새로운 양상,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지닌 독특한 특징, 미술사 작품으로서의 기록성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겸재는 <금강전도> 외에도 간송미술관 소장인 보물 1951 <풍악내산총람도>( 2), 왜관수도원 소장의 <금강내산전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강내산총도> 100여 폭에 이르는 금강산 그림을 남겼다. 어느 한 작 품도 소홀할 수 없지만 국보 217 <금강전도>는 정선의 금강산 그림 중에도 단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산의 명칭과 의미 금강산은 겨레의 영산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산이다. 금강산의 이름에 대한 유래와 그 변천은 시대와 종교를 반영하고 있다. 중국의 진시황(BC 246210)은 금강산을 영원히 죽지 않는 불로초가 나온다는 삼신산(봉래산: 금강산, 방장산: 지리산, 영주산: 한라산)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으로 알고 이를 구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불교가 널리 퍼지기 전 에는선산仙山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산의금강이라는 말은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동 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어 담무갈보살이 일만이 천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이러한 영향으로 송원대 중국사람들은원컨대 고려국에 나서 금강산을 직접 볼 수 있게 하소서(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하면서 금강산 보기를 내세의 소원으로 삼기까지 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인 12-13세기까지는 보통개골皆骨풍악風 嶽이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13세기 말 이후에 금강이 라는 이름이 서서히 사용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불교의 화엄경에 기초한 금강산과 우리나라의 금강산이 동 일하므로 불교의 성지라는 관념에 대해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의 반발이 심하였다. 그럼에도 사대부들 은 명산인 금강산을 여행한 뒤 기행문을 썼고, 그러한 여행을 숙원宿願의 해소로 여길 만큼 즐겼다. 17세기 후 반에 이르면 사대부들 사이에서 명산으로 유람을 떠나 는산수유람문화가 급격하게 성행하였고, 18세기가 되 면 사대부들은 멀고 험한 금강산으로 무리 지어 산수유 람을 떠나고 금강산에 대한 기행문과 여행 그림을 수 없이 그려냈던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불교의 성지인 금강산으로 순례한 것이 아니라 유교적인 산수관과 가치관을 발현한 여행이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불교적인 이름인 금강산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전통적 인 이름인 풍악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사대부들이 산의 경치에서 유래되었고 아취雅趣있는 산수유山水遊를 연 상시키는 풍악이라 부르기를 좋아한 것도 결국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관조하는 성리학적 성향의 발로였 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성리학적 이념이 천하제일의 명산인 금강산을 그린 <금강전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금강전도>의 양식적 특징과 담겨진 사상 <금강전도>라는 최고의 걸작을 겸재가 어떻게 그려내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사상은 어떠한지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이 걸작에서 겸재는 금강 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완벽한 구도를 구사하였고 경물들을 탁월한 안목으로 적절하게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겸재는 금강산을 한눈에 보기 위해 부감법 과 원형구도를 사용하여 일만이천 봉우리를 한정된 원형 화면 안으로 집어넣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전 설 속 나무꾼이 두레박줄을 타고 하늘나라에 오르면서 내려다본 듯하다. 화면의 왼편에는 무성한 숲이 있는 습윤한 토산土山을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으로 나타냈다. 오른편에는 강하고 활달한 암산巖山을 그려 좌우를 대조적으로 표현하였고 경물들은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왼쪽 토산 골짜기 하단에 잣나무가 빼곡하게 있는 곳에는 금강산의 유명한 사찰인 장안사와 무지개다리인 비홍교飛虹橋를 그려 넣었다. ( 3) 토산 과 암산의 계곡을 따라 표훈사, 토산과 암산의 중간쯤 에 Y자를 이루는 곳에 너럭바위가 보이는 곳이 만 폭동이다.( 4) 만폭동 너럭바위 좌측 독립 암봉이 금강대이고 만폭동 위의 오똑한 바위에 버섯이 자란 듯 한 봉우리가 향로봉이다. 토산 상단부 암봉 아래 정양사를 그려 넣어 실경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화면 상단의 가장 큰 봉우리로 표현된 암산이 비로봉이다. ( 5) 토산에 보이는 준법은 마麻의 올을 풀어 늘어놓은 것 같은 짧은 선을 거듭 찍은 피마준披麻皴과 미가 운산법米家雲山法을 사용하였고 쌀알 같은 점을 찍 어 습윤하고 부드러운 산을 표현한 미점米點을 사용하였는데 미점은 남송과 북송의 교체기에 문인화가 의 대표로 꼽히는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가 남방의 구름 낀 산을 그리기 위해 창안한 준법이다. 오른 편의 암산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주로 수직준법垂直皴法을 사용하여 금강산의 수많은 첨봉들을 표현하였다. 암봉을 표현한 수직준은 대개 강하고 활달하며 예리하여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금강전도>가 진경산수화로써 중요한 의미는 중국산수화에서 숙제로 남아있던 남종화법과 북종화법의 조화를 능숙하게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중국의 관념산수를 모사하 는데 머물렀던 사대부의 산수화를 실제 사생여행을 통해 실경을 확인하고서 자신만의 감정과 필치로서 대상의 특징을 살려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산수의 특징을 잘 묘사함으로써 실제의 경치, 바위이름을 그림만 보아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금강전도>는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고, 그의 진경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이 사생 유람을 통 해서 진경산수를 그린 노력과 성과에 대해서는 조영석의 《관아재고觀我齋稿》 <구학첩발丘壑帖跋>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원백元伯(정선의 자)이 일찍이 백악산 아래에 집이 있어 살았는데 뜻이 이르면 문득 산을 대하여 사생하니 준치고 먹 쓰는 데 마음 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었다. 그리 고 나서 금강 내·외산을 드나들고 또 영남을 두루 밟아 여러 명승에 노닐어서 그 물과 산의 형세를 모두 얻으니 그 공력의 지금함은 거의 붓을 묻어 무덤을 이룰 만하였 다. 이에 스스로 신격을 창안하여 우리 동쪽 사람이 한가 지 법식으로만 발라 대는 고루함을 씻어내니 우리 동쪽 산수화는 대개 원백으로부터 비로소 열린 것이다."

<금강전도>에 담겨 있는 주역의 음양원리 사대부 화가로서 겸재는 <금강전도>를 비롯한 작품들에 주역의 원리인 음양의 조화를 적용하였다. <금강전도 >는 구도에 있어서는 대담한 변형을 시도했고 필묵에 있 어서는 농담의 대비가 완벽한 작품이다. 이전까지의 금강 산 그림이 회화식 지도의 형식 또는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있었다면 겸재의 <금강전도>는 사실에서 사의로 대전 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는 겸재가 《도설경해圖說經解》를 지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주역에 밝았고 그의 사상적 근원이 주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형상의 음양대비가 아니라 내용과 정신에서의 음양대비를 그림으로 구현했다. 이를 그림을 통해서 알아보자. 맨 아래 장안사 들어가는 비홍교 우측의 굽은 봉우리의 상부가 짙은 색인 암봉을 장경봉이라 하는데 장경봉에서 비로봉을 잇는 토산과 암산의 경계인 만폭동 계곡을 따라서 연결하면 자연스러운 S자 모양의 태극문양이 나타난다. 태극이란 성리학에서 우주 창조의 첫 단계를 보여준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태 극에서 비롯되고 태극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변의 자연 질서이고 동시에 우주 존립의 근거라고 한다. <금강전도>의 구성이 음양의 원리를 따르는 것은 토산과 골산의 대비를 통해서 음양의 대비를 드러내었고 특정 경물을 통해서 이를 강조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정상의 비로봉은 남성의 성기처럼 유난스럽게 크고 불뚝하게 과장되었으며, 화면 좌측 하단의 비홍교 역시 여성의 그것인 양 별나게 크고 뻥 뚫려 있으며, 더구나 물까지 흐르니 노골적으로 양과 음을 상징하였다. 이 형상은 주돈이가 《태극 도설太極圖說》에서하늘의 도(乾道)는 남을 낳고, 땅의 도(坤道)는 여를 낳아, 두 기운이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한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이 걸작은 음양의 원리에 더하여 오행五行의 원리도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금강전도>가 원형의 구도라는 것은 익히 이야기하였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만폭동은 금강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너럭바위로 온 산의 물줄기를 한데 모아 아래로 흘러 보낸다. 너럭바위는 오행의 토土에 해당한다. 이 물이 흐르면서 보태져 장안사 비홍교에 이르면 큰물을 이루는데 이는 수水다. 6시에서 2시 방향의 암봉들을 보면 마치 불길이 번져 나가듯 크게 휘어져 있는데 이는 화火다. 한편 정상 부근에 창검인 양 줄지어 선 중향성 봉우리는 금金을 상징한다. 그 왼편 소나무, 잣나무 숲은 목木이다. 이로써 <금강전도>는 음양오행 사상이 표현된 그림인 것이다. 겸재가 주역에 능통하고 이를 그림으로 형상화시킨 예는 여러 곳에 나타난다. <금강전도>에서는 토산과 골산의 대비를 통한 음양의 대비를 드러내었고 <인왕제색도>에서는 적묵법을 이용한 흑백의 대비로써 이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또한 영조의 명으로 그려진 <장주묘암도漳州蓭圖>를 보면 정선이 얼마나 주역에 정통했는지 알 수 있다. ( 6) <장주묘암도>란 송나라 주자가 장 주지사를 지내던 시절 활터에 주역의 원리에 입각하여 후원을 꾸미며 묘암을 지은 일이 있었던 바,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 주자의 <묘암도기>를 그림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이 는 《주역》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인 것이다. 또한 겸재 만년에 대련으로 그린 쌍폭의 <음양산수도陰陽山水圖>를 보면 그가 주역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7) <음양산수도>폭포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목에서 암시하듯 사실적 의미를 관념적으로 해체시킨 겸재 만의 예술세계를 나타낸다.

<금강전도> 화제시畵題詩의 의미 <금강전도>의 상단에 있는 화제시가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겸제 정선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한껏 표현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만이천봉 겨울 금강산의 드러난 뼈를 누가 참모습을 그려내리 뭇 향기는 동해끝 해 솟는 신목에까지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누리에 서렸구나.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양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반쪽 숲은 솔과 잣나무로 현묘한 도의 문을 가리었네. 설령 제발로 밟아보자해도 이제 두루 다녀야 할터이니, 그려서 벽에 걸어놓고 베갯맡에 대어 실컷보느니만 못하겠네.” 萬二千峰皆骨山, 何人用意寫眞顔, 衆香浮動扶桑外, 積氣雄蟠世界間. 幾朶芙蓉揚素彩, 半林松栢隱玄關, 縱令脚踏須今遍, 爭似枕邊看不慳.

위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우에서 좌로 포물선의 형태로 글을 썼는데 이는 금강산의 형태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조형으로 보인다. 시의 첫 번째 연에 개골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겨울의 금강산을 그린 것을 암시하고 있고, 포물선 형태의 바닥에는갑인동제甲寅冬題라는 작은 글씨가 있어 갑인년 겨울에 그린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갑인년은 영조 10(1734) 정선이 59세로 청하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상단 좌측에는 <金剛全圖>라는 제목과謙齋라는 자필과謙齋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어 겸재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청하현감 시절 그린 <금강전도> 겸재가 경상도에서 <금강전도>를 그렸다고하면 상당히 당황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겸재는 청하현감 시절인 1743 <금강전도>를 그렸다. 겸재에게 있어서 청하현감 시절은 진경산수화를 완성하는 중요한 시절이었다. 겸재의 청하현감 부임은 후원과 교유관계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영조는 1733(영조 9) 겸재 58세 때 그를 경상도 청하 현감으로 발령하였다. 영조의 총애와 백악사단白岳詞壇의 후원으로 겸재는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의 명승을 사생할 수 있는 지역으로 여행을 하거나 지방관으로 나갔던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조영석의 《관아재고》 <구학첩발丘壑帖跋> 중 겸재가금강 내외산을 드나들고 또 영남을 두루 밟아 여러 명승에 노닐어서 그 물과 산의 형세를 모두 얻었다는 내용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겸재는 영조의 후원을 받았는데 영조가 어렸을 때 사저에서 직접 그림을 가르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평생토록 겸재를 부를 때 호인겸재로 불렀는데 임금이 호를 부른다는 것은 스승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백악사단은 겸재의 출생과 관계가 있다. 겸재는 숙종 2 (1676)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유란동幽蘭洞에서 출생하였는데 현재의 경복중고등학교 일대의 백악산白岳山 (북악산) 서쪽 아랫동네이다. 이 동네에는 조선성리학을 완성한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 율곡학파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스승으로서 겸재에게 학문적으로 사사하 였고 진경산수화의 이론적인 지식을 전해주었던 이들이 있다. 영의정을 지낸 문곡 김수항의 6형제인 몽와 김창집(1648-1722),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 노가재 김창업, 포음 김창즙, 택재 김창립인데 이들이 모두 겸재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6창六昌이라 일컬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주전론을 주장했던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증손자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겪은 후 청을 인정하지 않고 주자성리학의 정통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소중화 사상이 팽배했다. 율곡학파에서는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문화전반에서 조선고유색을 띤 고유문화를 꽃피우고자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삼연을 중심으로 진경시문학이 크게 일어났는데 그를 추종하던 이들이 대개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의 순화방順化坊에 살고있던 서인西人의 자제들인데 이들을 백악사단이라고 하였고 겸재도 당연히 백악사단의 일원이었다. 겸재는 스승인 6창의 후원으로 금강산 여행에 동참하여 1711 <신묘년풍악도첩>을 그렸는데 그 13폭이 전해지고 있다. 1712년에는 평생지기인 사천 이병연의 초청으로 금강산 여행을 하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라는 금강산 진경 21폭을 그려 이병연에게 선물하였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 작품으로 겸재는 사대부 사회에서 나라안 최 고의 명화가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좌의정 김창집이 동지 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북경에 갈 때 노가재 김창업이 자재군관으로 수행하면서 청나라의 대감식안인 마유병에게 공재 윤두서와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였다. 이때 마유병은 겸재 그림이 가장 좋은 그림이라고 극구 칭찬하였고 이를 기증하여 겸재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진 것도 스승의 후원 때문이었다. 이처럼 <금강전도>는 영조의 후원과 스승 집안의 배려 그리고 평생지기 이병연의 우정을 바탕으로 해서 겸재의 노력과 천재적인 예술감 각으로 만들어낸 청출어람의 걸작인 것이다.
 

 

도1. <금강전도> 130.7×94.1cm, 종이에 수묵담채, 1734년(국보217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도2. <풍악내산총람도> 100.5×73.6cm, 비단에 채색 (보물 1951호, 간송미술관 소장)
 


도3. <금강전도> 부분, 장안사와 비홍교 일대
 


도4. <금강전도> 부분, 만폭동 일대
 

 

도5. <금강전도> 부분, 비로봉
 

 

도6. <장주묘암도> 112.0×63.0cm, 종이에 채색, 1746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도7. <음양산수도> 30.0×39.8cm, 종이에 수묵(개인소장)(위가 양, 아래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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